※장문 주의※
선 요약: 유튜브 marian lee 채널의 "the 5 basic motions of piano technique"를 봐보세요. 만약 영상이 마음에 드신다면 gyorgy sandor의 "on piano playing"을 읽어보세요.
전 비전공자고 어릴 때 아파트 상가 피아노 학원 조금 다녔습니다. 중학교 때도 조금 쳤고 20대 중반이 되어서 다시 쳐보려 하고 있어요. 실력은 그저 그렇습니다. 옛날 영상 매체에서 빠르고 멋지게 피아노 치는 사람들을 보고 내가 저 곡을 사람들 앞에서 치며 박수갈채 받는 상상을 하곤 했지만 항상 상상 속에서만 그쳤습니다. 쇼팽 흑건과 햇빛, 나비의 악보 속 음표들을 하나하나 피아노 건반 위에서 더듬어가며 끝 마디까지 익히긴 했지만 속도를 조금 내보려 하면 여지없이 팔이 엄청 아파와서 그날 연습을 접곤 했습니다. 그런 일이 매번 반복되니 "나는 안 되는 사람인가보다" 하고 어느 순간 포기해버렸습니다. 그리고 그것보다는 조금 더 쉽지만 폼이 나는 곡을 찾아서 연습했습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조금 더 쉬운 곡을 깔끔하게 연주할 수 있는 것도 아니었습니다. 제 부족한 실력이 덜 드러나게끔 해주는 선곡을 했던 것이었죠.
그러다 작년에 유튜브 알고리즘에 우연히 "the 5 basic motions of piano technique"이라는 영상이 떠서 봤는데 일반적인 피아노 팁 영상과는 다르게 꽤 체계적으로 설명을 하길래 집 근처 피아노 연습실을 예약해서 저게 정말 효과가 있나 하고 시험해봤습니다. 놀랍게도 별 힘을 들이지 않고도 크고 좋은 소리를 만들어낼 수 있었고 일시적이지만 속주가 되는 경험도 했습니다. “이거 뭐야, 대박인데?”라고 생각하며 영상을 반복해서 보며 테크닉을 익히다가 영상 도입부에 gyorgy sandor의 on piano playing이라는 책을 소개하는 게 어느 날 눈에 띄었습니다(해당 영상에 출연하는 marian lee 박사의 교수님 되는 사람이 gyorgy sandor입니다).
on piano playing은 1995년 출간된 책으로 현재 절판되어 아마존에서 중고책을 웃돈을 주고 사야 했습니다. 다행히 구글에 on piano playing pdf를 검색하니 pdf본을 구할 수 있었습니다. on piano playing은 크게 보면 총 3개의 파트로 구성됩니다. 파트 1은 파트 2를 위한 배경지식, 파트 2가 본론인데 marian lee 영상의 5가지 기본 테크닉을 자세히 소개합니다. 파트 3은 여러 잡다한 주제를 다룹니다(페달, 암보, 공연 팁, 매너리즘 등). 저는 파트 1과 2만 3회독 정도 한 거 같습니다. 파트 3은 읽을 시간적 여유가 없고 영어 해석하기도 벅차서 아직 읽지 않았습니다.
보통 피아노 강의 영상 같은 것을 보면 추상적으로 얘기하거나 실질적인 연습 방법을 제시해주긴 하는데 뭔가 2퍼센트 부족한 느낌을 받았습니다. 이 책은 분명하고 당연한 전제들을 가지고 피아노 테크닉에 대한 논리를 깔끔하게 전개해나갑니다. 분명하고 당연한 전제들이라 함은 예를 들어 “우리는 중력의 영향을 받는다, 흑건은 백건보다 살짝 앞에 그리고 살짝 위에 있다, 인체 구조상 큰 근육을 사용하는 것이 작은 근육을 사용하는 것보다 큰 소리를 내는데 유리하고 피로감도 덜 든다” 등.. 논리적으로 피아노에 관한 이야기를 풀어나간다는 점이 정말 만족스러웠고 가려운 부분을 누가 긁어주는 듯한 쾌감마저 느꼈습니다.
이 책을 읽고 제가 얻게 된 것은 피아노 테크닉을 대하는 원리 원칙이 머릿속에 정립된다는 점입니다. 테크닉에 관한 모든 의문이 풀렸다고 해도 과언이 아닌 것 같습니다.
여러 예시를 들어보겠습니다.
1. 보통 피아노를 칠 때 릴렉스를 하라고 합니다. 그러나 몸의 모든 부위를 릴렉스해버리면 피아노를 칠 수가 없습니다. 결국 필요한 곳에 힘을 주고 그렇지 않은 곳에 힘을 빼고 릴렉스하라는 건데 어디에 힘을 줘야 하는지 알 수 있습니다. 릴렉스의 참 의미, 숨은 의미에 대해 알게 됩니다.
2. 올바른 테크닉을 익히게 되어 오래 연주해도 통증이 없습니다.
3. 피아노 테크닉을 대하는 관점이 생기니 유튜브 영상 속 피아니스트들의 행동이 이제는 분석 대상이 됩니다.
4. 운지법을 어떻게 해야 할지에 대한 의문이 자연스레 풀립니다.
5. 하농이 좋다 나쁘다 논쟁 아닌 논쟁이 있는데 여러 찬반 논란 속에 나만의 확고한 기준에 따라 각 주장들의 타당성을 평가하게 됩니다. 하농을 잘 쓰면 당연히 좋은 거고 테크닉 연습에 필요한 교재가 정해져 있을 필요는 없지 않을까 생각을 하게 됩니다. 줏대가 생깁니다.
책 한 권 읽은 놈이 제일 무섭다고 하는데 제가 전공자도 아니면서 지극히 개인적인 경험을 주워섬긴 것인지도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저에게 엄청난 변화를 체감시켜준 일이어서 글로써 공유하고자 합니다.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